2016년4월 최마루 시인의 부친상 중 장례식장에서
2016년 4월14일 음(3월8일) 오전 9시10분에 최마루 시인의 아버지께서
정확히 20년간의 기나긴 병고 끝에 한 자락의 바람처럼 자식들의 가슴에
피멍만 남겨둔 채로 대구광역시 서구 모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결국은
폐렴으로 훌쩍 소천해버리셨습니다
세심하게 언급하자면
이날 아침 6시30분경 요양병원에서 긴급하게 연락이 왔다며 아내가 급히
깨우더군요
그날 새벽 3시30분까지 책을 보다가 세시간정도 수면 후 불식간에 황급히
일어났지만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순간 무엇인가 매우 불안했었고 대충 씻은 후 병원으로 달려 가보니
이미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 채로 절실하고도 안타깝게 매우 거칠게만
호흡하고 계시더군요
얼마 전까지 담당의와 보호자로서 한 시간이상 아버지의 건강에 관한
상담을 나누었고 당시만 해도 콩팥기능이 다하여 심각한 심부전 증세가
의심된다면서 신장이식이나 투석까지 얘기가 오갔으나 심신이 너무
연로하신 상태라 이식과 투석 자체도 매우 곤란한 처지라하여 내내
제 가슴은 그저 애틋만 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담당 의사는 오늘을 넘기기가 어렵다며 애써 돌아갔습니다
아! 두려움이 너무나도 진중하게 몰려오는 날벼락만 같았던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찰라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직감하고 장자인 저에게 장례절차를 준비해야겠기에 모불교
대학 장례 상담사의 연락처를 알려주며 상세히 논의해보라며 병실에서
저의 등을 떠밀더군요
당시로는 누구와도 죽음의 대화 자체가 정말 싫었습니다
아니 죽어도 하기 싫은 전화를 병실 밖에서 어렵사리 소통하던 중에
어머니는 다급히 저를 부르시더군요
방금 막 운명하셨다기에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물론 대화자체가 불능이니 아버지의 귀한 유언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동안 가끔 병실에 찾아뵈면 저를 겨우 알아보는 듯 했을 뿐 몇 달 전부턴
아예 대화 자체도 아니 되었고 식사는 하루 영양식 캔 몇 통에 의존한 채
코로 주입하여 연명했으며 대소변도 간병인의 도움을 구하는 중이었기에
아버지가 중환자실로 입원하던 몇 달 전부터 제 일상도 지나친 근심으로
엉망이었지만 돌아가시기 전의 시간들은 늘 불안 등으로 사태가 더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다급하게도 이 기막힌 죽음의 순간 당장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무척이나 당황했고 당시만큼은 제 일생에 최악의 시간으로 기억이 됩니다
하지만
조금의 여유조차 부릴 상태가 도저히 아닌지라 조금 전 통화했던 장례
지도사의 안내로 대구 모병원 장례식장에 아버지를 안치했으며 수순을
차례대로 밟으며 상주로서 아버지의 영정사진과 함께 애절절하게 며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영복인지 실력 있는 장례 상담사의 엄숙한 진행으로
장례 행사는 그나마 무난하게 치르게 되었습니다
삼일동안 수많은 분들의 격려와 위문에 너무나 감사했으며 특히
먼 지역에서도 한걸음에 달려온 지인들과 친인척에게 그 감사함이야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하지만
중요 문제는 장례식장에서 삼일장 중에 마지막 날 일곱 시경 발인 전
두어 시간 잠시 졸다가 일어나자마자 사무실로 불려가니 나이가 지긋한
아니 그 가닥에서 매우 노련한 책임자인 듯 늙수그레한 이가 장례식장
사용 및 행사비와 식대 등의 세부적인 계산을 수기로 대충해놓는 듯
긁적여 놓은 허접한 종이에 최종계산서라며 몇 줄의 간략한 내용에 각각
액수만 뭉턱하니 기재해놓은 채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
합산한 총액을 생각밖에 많이 청구하더군요
물론
그 긴박한 시간에 계산기로 맞추고 정리할 여유로운 시간도 없었으며
장례차량은 이미 밖에 대기 상태였습니다
문득 생각난 건
아버지가 운명하셨던 첫날은 너무나 황망한 가운데 식장에서 무슨 안내라고
대충 종이위에 연필로 긁적이며 설명이랍시고 너스레처럼 얼버무려준 바로
그였습니다
당시엔 종교는 무엇인지 제사비용 얼마 등등 머리가 복잡했지만 누군가
뭐라 해도 당장 극한 슬픔이 앞섰기에 아무것도 정리조차 되지 않는
그야말로 가족들은 완전히 넋이 나간 상황이었습니다
첫날에 잠깐 기억나는 건 제가 당시 상황들과 혼란한 입장으로 이해가
불가 되어 그가 대충 설명해준 종이 서너 장을 복사하려하자 슬쩍 서류를
물리며 해당사항들은 추후 알려주겠노라며 슬며시 얼버무린 바로
그였습니다
그때 야릇한 촉이 서면서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은 잠시 했지요
그런데 그것도 발인 10여분을 남겨두고 조속히 계산을 치룬 후 마지막
의식 후 운구를 시작해야했습니다
다시 거론하자면
당시
저는 상주로서의 극심한 슬픔과 최악의 컨디션에 처음 겪는 일이고 보니
그걸 일일이 체크해가며 계산기로 따져 묻기도 뭣했고 동안 살아오면서
장례문제로 여러 지인들에게 들은 바로 저도 된통 당하는가 싶었습니다
몇 일간 심신이 매우 피로한 상태였지만 일방적인 그 기이한 계산서를
보는 순간 기분은 아주 지저분했습니다
장례 시 국과 밥만 간단 설명하곤 여러 음식들은 무엇이 얼마인지도
몰랐으며 심지어 음료 등 기타에 대한 비용들은 그저 사무실 직원들만
믿어야하는 상황이였습니다
그리고 곧 사무실로 가기 전 젊은 직원 한명이 물건들을 체크하며 확인 차
보여주었지만 제가 꼼꼼히 지켜볼 상황도 아니었으며 일부 지인들과
가족들은 짬을 내어 식사 중이었고 아버지의 마지막 제사 때문에 모두들
매우 어수선 했습니다
긴박한 사정이 이러하였으니 유가족들은 무조건 장례식장의 직원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윽고 사무실에 가보니 장례식 장부라곤 수기로 난잡하게 그려진 곳에
제가 확인한 물건도 있고 더욱 놀란 건 알 수 없는 사인들이 무성하더군요
물품량을 비교한 계산도 구부렁한 필기로 대충 그려져 있었고 그걸
토대로 엑셀작업을 한 것으로 보였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꼼꼼하게 하자면 분명 하자가 있어보였지만 상주인 제가 선뜻 이해가
되질 않는 상태였으니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놓고 아무에게나 확인 후 물건들을 주었다하면 그만이었고
유가족에게 확인했다면 그만인데 저를 비롯한 수많은 친인척과 문상에
다녀간 분만 수백 명이 넘은 상태이니 이미 제대로 가려서 확인할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계산은 그들이 일체 정리하였고 영수증이라며 종이 한 장 달랑
주는 게 모두였으니까요
물론 처음 겪는 일이어서 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무얼 어떻게 헤아려야만
할지 아무도 알려주는 이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극도의
슬픔으로 어머니 및 가족들 역시 심신이 상당히 지쳐있는 매우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며칠이 지났지만 아버지에 대한 슬픔이 더더욱 깊은지라 대충
넘어가려했지만 바로 다음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장례식장에서 눈뜨고
홀랑 당해버린 찝찝한 기억들이 너무나 저열해집니다
최소한 이 마루에겐 이러한 감성산업에서 납득조차 어려웠던 경험들이
너무나 비열해져버렸기에 한동안 치를 떨게 한 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당시에 발인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꼼꼼하게 따지고 싶었지만 심신이
너무나 지쳐 있었고 여러 정황상 어머니를 비롯한 유가족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죄송했으며 장자로서의 무게감과 친인척들께 대한
엄숙한 도리가 있었고 중요한 것은 아버지 가시는 길에 여타 잡음이
싫었으며 가장 조급하게 다가온 건 화장터에 오전 11시까지 늦지 않고
도착해야만 하는 시간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에서야 한낱 실수로 다가오는 건 제 입장에서도 당시의 경황들이
녹록하지도 않았지만 우선적으로 동생이나 믿을 만한 이를 선임하여 장례
비용 문제들을 철저히 검토한 후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은 것을 실책으로
제 스스로에게 경험상의 미비를 그저 자학할 뿐이었습니다
변명같지만 그 시기만큼은 저를 비롯하여 모두들 심신이 너무나 지쳐
있는 상태에서 장례비에 대하여 수많은 의심들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내심 그들을 진정 믿고 싶었습니다
하오나 무엇보다
이런 직군은 특수 업종임에 틀림이 없을 것인즉 최소한 서비스업이라면
극도의 슬픔에 사로잡힌 유가족들에게 유종의 미가 분명 필요로 했고
현실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이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린다면 아무리 영리를 추구하는 목적이 있다고 할지언정
장례식장의 운영에 대한 국민들의 인지는 미약한 게 현실적 상황이었고
누구나 외면하고 싶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경험이기에 쉬이 다가서기에도
어려운 집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 인생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존재이고 특히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떠나는 마당에 과연 그 무엇들이 소중하겠습니까!
당시 극도의 처지로 보면 만사가 귀찮고 모든 게 거의 체념 지경인이라
그 어떠한 표현으로도 비교할 수조차 없더군요
그저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싫었고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슬픔들이 극도로 밀려와서 혼절을 거듭하는 순간이었으니 매분매초
지치다 지치다가 쓰러져서 겨우 잠을 이루는 매우 심란한 경우었습니다
물론 죽음을 일상처럼 대면하는 장례식장의 직원들이야 그저 습관적으로
담담하게만 대할 뿐 유가족의 입장에서 당시의 그 막막한 심경이야
무어라 형언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삼일장중 서로가 특별히 묻지도 답하지도 않았으며 감정의
한계가 지금껏 살아온 삶 중에 가장 최악의 시간과 공간이었기에 그저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황망한 지경이었습니다
분명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나무랄 것도 없이 처지를 달리해놓고 볼일인즉
차마 이러한 부도덕한 경우는 도저히 있어서는 아니 될 경우인지라 나름
조심스레 생각해보지만 이승의 어디에서나 그 놈의 치사한 금전적인
문제들이 누군가의 이기심에 앞서 팽배한 부작용의 소치로 거듭하여
남아있었기에 그토록 지독한 탐심들이 사악함으로 변색이 되어 여느
죽음의 막바지에까지 한심하게 몰고 오는 것만 같아서 제 경험상 너무나
싫은 기억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사회 구석구석 대소의 차이는 다를지라도 그 병폐적인 부당함이
연일 끊이질 않는 까닭이고 보니 이 귀한 생애 이토록 기이한 감성의
불합리한 모순들이 참으로 안타깝고도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습니다
문득 슬피 떠오른 기억이라면
입관 시 마지막 아버지의 주검을 본 후 관 뚜껑에 제가 시처럼 사랑합니다
라고 적으며 가슴 깊이에서 불꽃처럼 올라오는 슬픔에 어렵사리
돌아설 때 그 순간이 가장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니 대구 명복공원의 화장터에서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영남대 사거리에 위치한 모불교대학 2층 미타전 납골당에
안치해있습니다
부디 아버지의 영전에 깊은 애도와 축원을 올리오며 세상의 희로애락
모든 거 훌훌 내려놓으시고 좋은 세상에서 늘 단아한 무지개빛 되오소서!
* 선친 - 경주 최가 다천공파 32세손
1936년 9월17일생 5남1녀 중 사남으로 대구 현풍 가천리 태생
포산중학교 중퇴이후 농사를 짓다가 양평에서 보병으로 36개월 현역제대
이후 세무공무원 잠시 근무 중 고향 친구사이였던 성이식님과 동업 후
대구에서 어렵게 자립하여 일생동안 가구업을 운영하셨고
한평생을 술로 회의적인 삶을 심각하게 달래시던 분이었기에
그 뛰어난 주사가 시인 최마루가 군입대하기 전날까지 심히 하늘을 찔렀다
덕분에 수십 년간 가족들의 고통은 남달랐고 하루도 쉬지 않고 거의
매일 술과 담배를 낙으로 심각하게 살아온 아버지가 61세가 되던 해
치매부터 온갖 질병들이 엄습하였으나 그 흔한 보험조차 없이 사업상
약간의 빚을 남긴 채로 경제적 활동을 환갑이 되던 해 그만 멈추어버렸다
이로
서서히 2차적인 물심의 부담감은 온전히 장남인 마루에게 전부 주어졌고
아버지의 일체 병원비는 어머니와 상의하여 수술 및 입 퇴원 등을 수습
하기에 급급했으며 형제가 있어도 모두 가정사가 있다 보니 온전히 장남의
책무로 남아버렸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가끔 야간에 불시에 숨을 거둘 것 같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뛰어갔던 기억들이 선하지만 마지막 병간호는
고스란히 함께 하는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갔으니 그 연세에 고충이야
오죽했을지 그저 가슴이 메일뿐이다
하여
근 20년간의 병마를 온가족들에게 81세까지 본의 아니게 남겨주시었다
아버지는 대한민국 시인 최마루에게 이 진귀한 세상을 보게 하셨고 가장
매서운 희로애락을 애증으로 선물하셨고 그중에 심란함에 휘둘린 가난과
아픔들과 괴로움과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들을 아름다운 유산으로
지정하여 머리와 심장이 터질 지경의 엄청난 무게를 지금까지 죽을 만큼
잔뜩 쌓아주셨다
이에 시인으로서 평생을 잦은 불면증과 공황장애 및 무서우리만치 엄습하는
된고독으로 포복하게 하여 별과 달을 바라보며 정진하도록 일깨워주셨고
매번 눈물이 마르지 않는 박복한 가정에 살아있었기에 마냥 싫기만 한
장남으로 선정하였으니 필자에게 드센 운명의 끝자락에까지 존재의 의미로
신중히 낳아주시다
하오나 지금까지 가슴 깊이 아버지에 대한 잔해는 심난하게 남아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부모자식간의 깊은 사랑으로 물같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끝으로
평소 아버지의 생전에 성정이 여리셨고 순수함이 물씬했지만 술로 얽힌
일화는 마루의 일생에 소소한 설화로 남아버렸다
* 이제 아버지에 대한 흠모를 애절하게 새기며 시인 최 마루의 영원한 복위
☆ 글쓴이 소개 ☆
*대한민국 시인 文名 최마루님의 글입니다.<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음>
*<주의*주의!!동의 없이 무단전재, 표절 및 재배포, 복사등 절대금지>
choe33281004@nate.com *시인 최마루의 분홍빛 문학정원에서
언제나 이채로운 나날처럼 여러분에게 즐거운 행복만을 고대합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최마루 시인의 단아한 음률들과 함께 어울리시어
세상에서 가장 평온하게 여러분의 고혹한 감성들 마음껏 열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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