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물을 벗어가는 세월
( 대한민국 영원한 예비역 시인 최 마루의 위대한 군인정신 )
내 오랜 젊은 날!
최전선의 오지에서 단 무늬 군복에 푸르른 물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군기의 시기가 문득 떠오릅니다
이글은 과거나 현재의 군문화를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과는 달리
보다 훌륭한 병영문화의 발전을 진실로 고대하는 바이며 참다운 군인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인지를 참고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80~90년 현역시절 당시 제복을 입은 군인이라면 뼛속까지 군인이어야
했습니다
최전방에서 소총과 대검 및 방독면과 수류탄을 착용하고는 항상 적과
대치한 상황이고 보니 늘 생명과 직결된 상태에서 한시라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더군요
허나 어느새 지천명이 가까운 시점에서 생각해보건대 남자의 일생에
군복은 젊은 날에 강인한 기억의 문신이었으며 그 가치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면 황금의 시간을 크게 얻어가는 시기였습니다
더욱이 신이한 것은 수십 년이 지난 아직까지 군번이 기억나는 건 역시
나도 한때 강직한 군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군 복무기간 내내 강인한 군기 속에 현역으로 단체생활을 해보았던
이라도 별다른 생각없이 군복을 입었다가 벗었다면 정녕 할 말이
없겠습니다만 혹자는 나름 생각에 따라 살아가는데 꼭 군복무의
경험들이 대수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인 최 마루에게는 분명히 남달랐습니다
아니 살다보니 문득문득 고난이 엄습할 때나 어떠한 일에서 매우 곤란
할 때 최상의 의지력에 꽃이 필 때가 있었고 군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어떠한 난관들을 무난하게 해결할 시에는 스스로 칭찬하기도 여럿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굴곡진 삶을 살아가는데 지극히 도움이 되었으며 무사히
전역 후에는 능동적인 삶을 구가하는데 초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현재의 젊은이들에게는 군의 선배로서 무엇보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 주어야하고 좋은 것은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는 게
현명한 방책이라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군대는 아무리 배불리 먹고 편해도 가고 싶은 사람이 아마도
없을겁니다
물론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남자들의 세계는 약간의
충돌도 심하지만 않다면 때로는 살가운 추억이 되기도 하지요
분명한 것은 군인은 생명의 존엄성을 품고서 적을 살상할 수 있는
존재이며 보다 뛰어난 용맹과 투철한 정신력으로 무장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물론 하루 이틀만에 이루어지는 기상도 아니지만 제대할 즈음되면 정말
군인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전방에는 여러 각양각색의 부대가 많습니다만 저는 포병부대에서
가신포수부터 행정 포대장 짚차 무전까지 특히 무전 음어측정 대회에서
줄곧 1위를 차지한터라 더러 사단교육에도 참석하였지요
더구나 사단 군법당에 군승으로 이어진 특별한 경험들로 20대 초중반에
긍정적인 인성으로 완전히 개조해버렸습니다
군복을 벗은 후 나의 모습은 밖으로는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안락하게
안으로는 바늘보다 날카롭고 단단하게 아직도 그 젊은 날을 잊지 않고서
힘들 때마다 나를 나에게 매우 강인하게 훈육해왔습니다
또한 거의 매일을 늦은 새벽까지 책상 앞에서 시어를 너무나도 사모한
나머지 끝도 없이 방황하며 날아만 다니는 저의 영혼을 모질게도 잡아
두는 마음도 군복무 당시 지독하게 나를 몰아쳐온 3년 동안의 집념일
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름다운 시심을 항상 간직하고 살아왔던 청소년기의
내적심리가 군복을 입은 후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군인이기 위한 훈련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어차피 3년의 세월을
복무해야한다면 시인으로서 죽음의 문턱도 용기있게 건네 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인한 의지를 굳세게 호출하였습니다
당연히 작가이기 전에 대한민국의 명예로운 군복을 입은 군인이었고
내가 전선을 지키지 못한다면 나의 목숨도 불안정하거니와 사랑하는
가족들도 죽임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놓고 소총과 대검을 홀대할 까닭이 없었으니 더욱 용맹한
군인으로 거듭나서 내 젊은 날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도록 당당하게
군복무에 임했습니다
이어 수십 년 전의 우렁찬 함성에 전율을 느끼며 당시 칼날같은 거수
경례를 소담한 지면에서나마 힘차게 그려봅니다
이 글의 요지는 사람은 지극히 환경의 동물이라 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해봅니다
내 자신의 유년시절이 거꾸로 스물스물 떠오릅니다
현역으로 입대 전까지 성격이 매우 온순했으나 사실은 어수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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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지요
군복을 딱 입는 순간부터 이건 체육대학도 아니고 아주 장난이 아니더라
이 말입니다
먹는 거부터 싸는 거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거기다가 훈련과
군기로 잡아 족치는데 가끔 늦은 저녁이나 새벽에 비사격 출동에다가
5분대기조 및 수색 매복 등에 참으로 정신없게만 하더군요
특히 여름철 강원도의 특이한 벌레와 모기떼의 극성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을 맛보았습니다
더구나 무수한 작업은 계절별로 엄청나게 쏟아졌고 매일을 아무리 헤쳐
나가도 정말 끝이 없었습니다
매초 매분 잡생각할 틈이 아예 없었으며 군복무 동안 취침을 제외하곤
한시라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습니다
군복을 입은 후 얼마나 피곤한지 매일 누우면 곧바로 잠이 들어버리더군요
평소에도 틈만 나면 무조건 졸기일쑤였습니다
군대에서는 그만큼 충분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아예 주어지질 않았습니다
더구나 공수부대의 자존처럼 안 되면 되게 하라 는 구호가 군복을 입은
자에게는 참으로 군인의 정신력을 강조하는 언행 중에 참언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대에 배치부터 부대 내 텃새도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늘 엿같은
것은 지역의 특수한 날씨와 시시때때로 가혹하게 날아오는 군화발이나
주먹세례와 더불어 각종 몽둥이 야삽 곡괭이자루 등이 화려하게 춤추는
환경들로 환장하게 하더군요
딱히 이유는 없었습니다
웃는다고 시비 걸고 목소리 적다고 시비 걸고 여튼 웃기지도 않았지요
사실 처음은 다소 곤란했지만 어눌한 이가 고참이랍시고 얼마나
못살게만 굴던지 날이 갈수록 점점 독기가 오르더니 새로운 나의
모습으로 서서히 탄생되어갔습니다
아니 확실한 것은 군대에 적응을 위하여 맞춤 성격으로 전환이 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니 눈치도 생기고 긍정과 부정의 곡예에서 상황에 따라 모두가
좋은 게 다 아님도 알게 되더군요
나름은 어떠한 고난에도 강직한 군인정신이 살아있다면 적소에서
묘안들이 적당히 떠올랐습니다
복무동안 서서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서 그동안 나약하게
살아왔던 그림자의 옷을 서서히 벗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거기도 나름은 사람이 사는 지역이라지만 정말 대단들 하더군요
더구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냉전의 대지였고 가끔 김일성고지와
모택동고지에서 들려오는 이북방송이 참으로 냉랭하고도 음산했습니다
지난 세월에 통절의 시대상이 참혹하게 상상이 되었고 공산주의의
잔혹상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같잖은 삐라도 장난 아니게 날아왔습니다
당시 국민학교 시절부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란 이승복 어린이의 항거
부터 투철한 반공교육으로 인하여 북한의 사정을 나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그들의 보잘것없는 형편이야 철책선 너머로 죄다 보이니 저들이
애써 자랑질을 해대여도 갖은 거짓인지를 우리 장병들은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 년에 한번정도 괴깃국에 이밥 말아 먹었다는 삐라를 보면
아주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우리 군은 한 달에 몇 번씩이라도 닭계장에 돼지두루치기 육개장에다가
정량을 훨씬 넘겨서 아주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많이 남아서 버리는 게
음식물이었는데 그걸 보고 누군들 웃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고기국 먹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저토록 호들갑을 떠는지 아주
기가 막히더군요
포병의 관측소에서 휴전선 너머에 그들을 지켜보면 이곳저곳의 땅굴
속에서 기어 나오는 무기들도 마냥은 허접했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허술한 상황이 훤히 다 보였지요
휴전선 너머 식사시간이면 으례히 땅속에서 연기가 올라왔고 군복조차
정말로 초라해보였으며 인민군들의 행색이 매우 궁색해보였습니다
하나같이 건강상태도 별로였고 솔직히 소총만 깨끗했지 한마디로 엉성
하면서도 거지들의 무리 같았습니다
휴전선 너머에는 산을 아예 개간하여 구황작물을 심어서 자급자족을
하였으며 한마디로 폐허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습니다
가끔 망원경으로 북한군 초소를 건네 보면 손바닥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저들 나름대로 무슨 사상교육을 쓸데없이 암송하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밤이면 건너편에는 아주 새까만 것이 우리와 달리 칠흑같은
밤이었습니다
우리 측의 휴전선아래에는 유일하게도 해안마을을 제외하곤 군 생활
중에 극도로 외로운 것은 최전선에는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로지
산이고 바위뿐이었으며 민간인 접근금지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길을 잘못 들여 약초 캐러오는 화전민 중에 대낮에
할머니라도 만나면 군인들은 야단이 나지요
그저 여자라며 좋아서 펄쩍 뜁니다
이조차도 기껏 일 년에 한번 있을까한 현상이지만 분명한 건 민간인은
무조건 출입금지구역이었으며 군사작전 지역이어서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아주 왕래가 드문 지역이다 보니 약초가 무성해있고 약초꾼들의
욕심이 앞서다보니 군인들의 눈에 아주 가끔 희귀하게 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유심히 약초꾼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 및 정확히 신분
확인 후 안전지대로 안내하여 절대로 입산불가를 알립니다
그러나 부대 주변의 주민이라 할지라도 밤이라면 적으로 간주하기에
상황은 아주 달라집니다
하기사 너무나 골짜기다보니 부대 내에서는 군인들 외에는 민간인
만나기가 무척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이처럼 현역 군인들은 가족이나 지인들의 특별한 면회를 제외하고
24시간을 주둔지에서만 거주합니다
왜냐면 우린 전투부대였고 전시 상황에서는 최전방어선을 사수해야하는
과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최전방부대 중에서도 소양강 때문에 유일하게 수영유격이
존재해있었습니다
유격 이거 한마디로 군인들을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단 특성상 육상과 강의 두 종류 유격을 모두 해내야했습니다
수영유격은 해병대처럼 보다 능동적이지는 않았지만 고무보트부터 완전
군장한 채로 임시 구명대를 만들어서 강을 건너는 도하훈련 등등 정말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특히 한참 뜨거운 여름철에 극기 훈련을 맞으니 부대원들은 아무래도
신경들이 날카로워져있는 상태였지요
빡센 훈련은 훈련대로 수행하고는 곧이어 철통 경계근무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또 명령대로 투입해야합니다
경험상 근무 중에 교육이랍시고 고약스러운 고참에게 이유없이 가장
많이 얻어 터집니다
입대한지 얼마지 않아 새벽 근무에 고참에게 별다른 까닭도 없이
개머리판으로 가슴팍을 20여대를 찍히고 보니 며칠 동안은 아예
숟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어느 날은 완전무장을 하고 60트럭에 올라서 사주경계 후 수색을
나갔더니 지뢰탐지기에 폭우에 쓸린 발목지뢰가 포착되었습니다
순간 아찔하더군요
다행히도 비켜갔지만 거긴 전투지역이고 정말 위험했습니다
빗물에 쓸려오는 오래된 폭탄이나 지뢰들이 꽤나 많았습니다
심지어 한국전쟁 때 비행기에서 낙하한 50년대 녹슬은 포탄도 수십 년간
땅속에 곤두박질한 채로 잠자고 있더군요
가끔은 부대의 인근 주민들조차 농로까지 쓸려 내려온 지뢰에 사고로
이어졌으니 말이지요
교육대에서는 한국전쟁 때 전투 중에 부러진 인민군의 낡은 따발총도
이산 저산에서 여러 자루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면서 섬뜩 하더군요
근무지는 예전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경로이기도 해서 경계가 항상
삼엄했습니다
분명 사회 있을 때의 아름다운 평화와는 달리 냉랭한 휴전선은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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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6월 어느 날 입대 두 달이 지날 즈음 완전 무장한 채로 포병으로서
첫 훈련을 맞닥트린 아! 도사리 계곡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훈련 첫날부터 늦은 저녁까지 강한 폭우 속에 강행했던 무시무시한
훈련이 죽을 때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날 것 같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포병군기 이 또한 무시무시했으며 예비 진지에서
군화발이 훨훨 날아다녔습니다
포탄이나 장비들은 엄청나게 무거웠으며 위험 상황은 언제나 주변으로
널려있었지만 군인이기에 명령이라면 무조건 수행해야했습니다
더구나 포사격 시는 몇 초간의 시간과도 다투어야했고 땅속에 돌들을
모래처럼 마구 부수어야했습니다
전시와 똑같이 일사불란은 물론이요 식사도 그냥 식간통 하나에 모든
음식물을 퍼담아서 철모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더러운 건 고사
하고 분과별로 여럿이서 대충 삼분내로 급히 퍼먹고 바로 이동하는
전투식사였습니다
솔직히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대충 한 끼 때우고 설거지조차 없이 바로
긴급하게 작전에 투입해야했습니다
아침 일찍 시작한 훈련이 자정이 넘어서도 아예 끝날 생각을 않더군요
정말 피곤하다 못해 졸도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온몸에 군기는 가득했으며 이런 훈련을 일주일 이상 계속하여
이어졌습니다
말이 훈련이지 전쟁과 같이 수행하는데 새벽에 조명탄을 쏘아 올리는
순간 고향에 어머니 생각이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당시 훈련 중에 가장 괴로웠던 것은 훈련 첫날부터 내내 비가 쏟아졌고
소형텐트에서 군복이 흠뻑 젖은 채로 대충 수면을 취한 후 계속하여
이동하는 강도 높은 훈련에 지치어서 그야말로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훈련 중 식사는 마냥 대충이었고 늦은 저녁이면 분과 고참에게 라면
하나 얻어먹는 게 행복이었습니다
다음날도 자정이 한참 지나서 잠시 휴식 중 긴급 명령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도착지에 새벽 한 시경에 다다랐습니다
얼마지 않아 포사격 명령이 하달 되었습니다
시간은 아주 촉박한데 그 도사리계곡에서 폭우가 너무나 불어나서 포신
다리를 붙들고 애를 먹다가 고참에게 함마(철근을 끊을 때 쓰는 대형망치)
로 무참하게 호박이 깨어졌지요
더구나 사격명령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대초까지 살아오면서 최고로 긴장했으며 정말 최상으로 황당했습니다
하필이면 내가 방열해야할 자리가 물이 지나는 하천이었는데 엄청나게
불어난 물에 정말 감당하기가 너무나 벅찼습니다
순간 자존심도 무척 상했고 고참들의 무식한 구타와 폭언에 돌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밤이다 보니 혹여 미친 고참에게 잘못 맞으면 병신 되는 건 뻔했으며
군에서는 어떠한 사정에서 이해나 인정이 아예 없었습니다
종일토록 내린 빗물에 물이 불어난 상태에서 명령대로 포방열을 하던 중
그것도 새벽에 불빛 하나 없는데서 기도비닉을 유지한 채 물속으로
고정을 시켜야하는 포수의 임무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진정 난공불락
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무시무시한 군기로 삽시간에 수중 잠수를 하여
그 무거운 포신다리를 기어이 박아내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그 순간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 나조차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살아있는 군기를 그때 느꼈고 군대는 분명히 무언가 달랐으며 의식의
변화없이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군기를 위한 약간의 질타를 이때 저는 어렴풋이 배웠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악습이 관행이 아닌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군인의 중요
자세에 진정 각성을 위한 가르침이라면 적당한 훈육은 군인으로서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도 긍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더없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동시기에 함께 복무하는 군인들은
전우애가 깊어야했으며 서로에게 매우 필요한 동료가 되어야했습니다
당시 안경은 물속에서 잃어버렸지만 그날 이후 나는 더욱 강인한 군인의
정신력에 서서히 다가서기 시작 했습니다
처음 경험해보았지만 강원도 최전선 지역의 비는 소의 오줌과 같았습니다
순식간에 엄청 내리는데 아예 물귀신을 만들어버리더군요
판쵸우의를 입었어도 온몸은 빗물에 젖은 생쥐처럼 엉망이었고 6월 달
인데도 불구하고 으스스하게 추운데다가 새벽이라 잠도 쏟아지고 배마저
고파서 그야말로 온몸이 너무나도 괴롭더군요
위장으로 철모에 꽂아둔 나뭇가지들조차 아예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엄격한 훈련 중 본의 아니게 안경마저 잃은 상태로 가신
구덩이를 파다가 손바닥은 찢어지고 매서운 한기조차 무심하게 찾아왔던
참으로 괴로운 시간들이 기억의 끝자리를 지금 막 번개처럼 스쳐갑니다
당시 군에서는 멍들고 찢어지는 건 다반사였으며 치료조차 운이 좋으면
덕을 보고 아니면 그렇게 넘어가버렸습니다
단 몇 시간의 수면 후 전포대의 긴급방렬 이후 잠시 명령대기 중 사격
명령에 일시적으로 엄청난 포연을 거침없이 뱉아 내고는 또다시 긴급
이동은 계속 되었습니다
명령이라면 그곳이 자갈밭이든 암석이든 삽시간에 가신의 규격에 맞도록
넓고 깊게 땅을 파내고 가신다리를 무조건 단단하게 고정시켜야했습니다
그런데 지역상 대부분이 마사토 땅인지라 포병들에게는 악마의
땅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가신을 제대로 땅에 고정시키지 않으면 포탄의 정확도가
떨어지니 포병부대에서는 방열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게 없었습니다
첫 훈련 내내 비가 미친듯이 내리는 가운데 훈련의 강도는 새벽 내내
굉장하더군요
이 또한 군인이기에 무적포병을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하며 오로지
강인한 군기로 버티어내었습니다
만약 정신줄을 놓아버리면 나부터가 최소 중상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입대한지 얼마지 않아서 포병으로 거듭나던 도사리 계곡이
전역 후 내 인생에 위대한 그림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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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복무 중에 징그러운 것은 겨울이면 눈마저 하늘이 뚫린 듯이
퍼붓고는 허리까지 펑펑 쌓여버립니다
종일 아무리 치워도 다음날 똑같은 높이입니다
그야말로 질곡의 땅에 근무해보니 군인들을 괴롭히려고 작정한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었죠
한겨울 동계훈련은 거의 지옥훈련입니다
저녁에는 침낭 안에 군화를 밑으로 넣어놓고 함께 자야지 머리맡에 두면
다음날 얼어버린 군화는 주인의 발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이러니 무조건 뛰고 움직여야 살아납니다
매번 수색이나 매복 시에는 최전선으로 신속하게 투입하여 임무완수가
끝나면 무전으로 보고를 한 후 명령에 따라 긴급하게 이동해야했습니다
어벙벙거리면 바로 야삽이나 군화발이 그대로 날아왔습니다
군은 항상 신속 정확을 요구하였고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나뿐만
아니라 모든 대원들의 목숨이 항상 위태로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야간 매복 시에는 시야확보가 곤란하니 청각이 정밀해지더군요
하루하루가 다르게 나의 본능은 그때부터 세밀하게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선에서 북괴군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했고 나의 방심으로
내 동료가 죽임을 당하는 곳이었으며 적을 바로 앞에 맞이한 곳이고
보니 멍청한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소통되지 못하는 곳이 바로
군대였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진정 군인정신이 아니면 그냥 죽음이나 불상사와
맞바꾸어야했지요
가끔은 잠깐이었지만 제 자신도 놀랄 때가 있었습니다
각종 벌레들이나 미끈한 뱀들이 처음에는 징그러웠는데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가지고 놀더군요
입대 초 포반장인 어느 하사가 훈련도중 포상(대포의 집)에 나타난 뱀을
잡아서 입속에 담배공초 하나를 잠시 밀어 넣었는데 그렇게도 손목에서
또아리를 털며 옥죄던 녀석이 일자로 뻗어서 그대로 기절해버리더군요
반합에 푹 끓인 후 몇이서 한 사발씩 다정하게 나누었습니다
분위기상 어느새 서서히 군인임과 동시에 근육질의 남자가 되어가더라
이말입니다
부대주변의 환경을 보자면 여름철에는 각종 나비들이 날아다니는데 정말
놀란 건 날개에 태극문양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진 나비가 있더군요
배가 빠알간 김일성개구리부터 엄청난 사마귀 흡혈파리 등 거기다가
각양각색의 식물들 자연을 그대로 보자면 그야말로 천혜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인인 이상 당연히 눈동자에는 생기(살기)가 돌았고 소위 말해
빠릿빠릿해지면서 군복에 각이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복을 입은 자는 명령을 받으면 죽음을 불사하고
절대 당황하지 말 것이며 무조건 임무를 완수해야하는 게
군인정신이었습니다
살아서 돌아오면 훈장이고 죽으면 국군묘지라 했습니다
이것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운명의 군복이었습니다
그토록 혹독하게 서열 위주의 군대에서 내리 정신교육을 받아버렸습니다
얼마나 무거운 걸 들고 뛰고 또 뛰어다녔는지 온몸부터 종아리에 바늘도
튕겨나갈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말이지요
포병부대는 타병과에 비해 차출되기가 어려운데 제가 배치 받게 된 건
참으로 행운이었습니다
유격을 제외하곤 행군이 없었지만 내무군기나 기타 군기들이 엄청나게
많더군요
포병부대 외곽에서 가끔 소총 사격을 하면 거의 백발백중이다 보니
부대원들에게는 집중력으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군요
그러나 야간사격은 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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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수년전이지만 전입한 부대의 첫인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더블 백을 메고 행정반에 막 들어서자 구리빛 얼굴에 대부분이
장신들이었고 덩치들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농구공을 한손으로 잡는다든가 40키로의 짐을 양쪽 어깨에 하나씩 메고
가벼이 돌아다니는 괴력들을 보곤 그저 아연실색이었습니다
포탄상자는 또 얼마나 무거운지 포사격을 할 시에는 포탄상자에 일명
빠루로 널찍한 철띠를 한 번에 제껴서 뜯어내어야 했으며 여러 정황상
포사격 준비도 절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해도 고참들은 항상 동작이 느리다고
엄청난 폭언과 폭행을 안겨주었습니다
당시는 한마디로 망치로 대가리를 맞아 피가 줄줄 흘러도 그저 군기로
받아들여야했습니다
분위기상 상황이 이러하니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로 정신줄을 놓을 수가
없더군요
말로만 들었던 포병군기를 감당해내는 몇 달은 거의 죽음이었습니다
거기다 아주 고약한 윗선임의 갈굼과 폭행은 아주 도를 지나치더군요
90여 명 중에 개구리나 뱀을 대충 구워서 먹는 이들부터 전국에 별의별
그야말로 잡놈들이 다있더군요
비만 오면 속옷만 입고 축구하자는 이상한 고참도 있었고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손만 움직이면 뚝딱하고 요술처럼 만들어내는 재주꾼도
있었으며 각자 입대전의 직업들도 아주 다양했습니다
희한하게도 제가 배치받은 부대가 일명 산적포대로 전시에 제일 먼저
적진으로 투입되는 부대였는데 부대원들의 대부분이 이상하게도
편모편부의 가정사가 많았고 성격들마저 대다수가 상당히 거칠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슨 조직에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이 조둥이에 항상 욕설을 달고 살더군요
내색은 않았지만 참 웃기는 고참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30개월을 버티어내려면 최소한 고참들 보다는 단단해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늘 포상마다 집합해서 줄빠따에 날마다 이어지는 폭언 및 폭행에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독기가 스며 나오더군요
자대배속 얼마지 않은 어느 날 어떤 고참놈은 뱀을 잡아와서 자신의
군복바지에 넣어놓고 내 손을 슬며시 잡더니 바지 속으로 집어넣더군요
그 싸늘한 기분이 지금도 몸서리 쳐집니다
평상시 일과는 기상 후 일석점오 시까지도 항상 까이는 것도 문제였지만
새벽에 자는 사람을 깨워서 정신교육이랍시고 불러서는 아구창을 날리니
정말 미치겠더군요
난 그때까지 주먹을 쓸 줄도 몰랐고 아예 쓰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군 생활 중에 하도 같잖은 일들을 수많이 당해보니 너무나
안타까웠고 분노조절조차 힘들었지만 후임들에게만은 절대로 악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으며 내가 근무하는 부대만큼은 내 선에서
그만 감당하고 말았습니다
동기들도 모두 좋은 친구들이었고 그들 역시 저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물론 제대할 때까지 함부로 후임들에게 대하지도 않았으며 보다 안락한
군 생활을 유지하도록 그렇게 스스로의 약속을 전역하는 날까지
굳건하게 이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한 것은 군은 계급이 깡패였고 먼저 입대했다는 텃새가 무슨
대단한 규범처럼 존재해있었는데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이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는 이상 악습은 계속하여 이행되어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도 특별한 대안이 없었으니 예감상 사건사고는 크거나 작게라도
내가 전역한 후에 계속 발생할 것 같았습니다
더욱이 국민을 위한 군대라지만 특히 명령위주의 특수한 구성원들이고
보니 밖으로 노출되는 걸 상당히 싫어했으며 아무래도 민간에 간섭
받기가 버거운 듯 했습니다
군은 분명 특별한 단체이기에 보다 살아있는 군기 확립은 확실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살아있는 군기에 모든 장병들이 솔선수범할 수 있는 조건을
군당국에서는 군대의 감성으로 배려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타이르거나 장병들에게 눈치를 볼 까닭도 없거니와 군은 분명
군이기에 구타와 폭언을 제외한 입장에서 확고한 대안을 획기적으로
현실적으로 제시하여 군기의 목적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에게 매우 괜찮은 안건이 있으나 군에서 얼마나 적용할지도
모르거니와 이 또한 극비에 운영할 사안이라 여기서는 금함을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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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대략적인 내용은 당시만 해도 군대니깐 비록 악습이라도 참는 게
관행이라 생각했고 그게 상책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후 단체 생활인 군의 특성상 대선배님들부터 아버지에 이어
이토록 모질게만 생활하면서 무조건 인내 하나로 참아내었으리라 짐작만
했었습니다
저 역시 어떠한 부당한 대우라도 지나치지 않으면 마냥 잊어버리는 게
오히려 편안했으니까요
하지만 폭풍이 지나면 평화가 오듯 이제는 군대의 철학이 반드시
바뀌어야합니다
복무 당시 크고 작은 훈련이 계속 이어졌으며 비상이나 야간 훈련은
자주 실시됨과 동시에 군대는 학력이나 나이같은 건 전혀 통하지 않아도
빽은 통했습니다
포병은 특수한 전술상 100% 전방에 배치되어있습니다
또한 문명 생활과는 아예 동떨어진 상태로 강원도 지역상 거의 6개월
정도가 겨울이었으며 온통 산으로 둘러있는 가운데 북한군이 조금만
이상의 징후를 보이면 즉각 비상이 걸려버리니 때론 죽을 맛이었습니다
북한군의 특징은 평소에 전투모를 자주 쓰는데 철모는 아주 가끔
착용한다는 것이며 철모도 투박하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80~90년 당시 그들의 군복무는 7년으로 신병들은 우리와 같이 단무늬
푸른 군복이었지만 보급이 매우 부실하니 고참일수록 군복이 누렇게
변색되어서는 아주 후줄근하게 휴전선을 돌아다녔습니다
탄띠의 수통도 그냥 비닐끈으로 묶어서 덜렁거리는 걸 맞은편에서
보는데도 남쪽보다 잘 먹고 잘 산다고 거짓방송을 해대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최전방에는 5월 달에도 휴전선의 산 정상에는 흰눈이 쌓여 있었고
입대 첫해 90년 10월1일인데도 첫눈이 펄펄 내리더군요
주특기교육도 거의 수준급으로 항상 육신이 괴로운 상태에 숙련되도록
익힌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과제였었지요
하지만 군인은 강인해야했으며 국방부 시간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주 일과로는 포반일 경우 무시무시한 방열 훈련과 각 분과별 주특기
교육 및 기타 포병장비 검열과 포의 정비 등 계절별 작업 및 포상진지
공사 등 삼년을 일개미처럼 살았으니 온통 신체들이 그야말로 진정
군인화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포병의 경우 한번 사고는 대형사고이기에 어떠한 위기에서라도
그만큼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훈련 전날은 무조건 전부대원들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기 위하여
무시무시한 한따까리가 시행되었습니다
전원집합이후 수통뚜껑에 머리박기 깍지 끼고 엎드려 뻗히기 원산폭격에
군화발로 복부를 사정없이 걷어 채이기 원산폭격 후 앞으로 전진하기 등
당시만 해도 그것들이 당연시 되었지요
포를 다루는 것은 총알을 만지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포병의 가벼운 실수로 인한 사고는 아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할 뿐만
아니라 군의 사기에 직격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때 포병의 자부심으로는 확장탄약을 장착하여 파괴력을 조준함과
동시에 초탄명중 후 초정밀 포격에 있어서 적군의 초토화라는 것이
중점이었으며 다양한 포병전술로 보병지원과 사격체계의 기본을 곧바로
교육 실시해야했습니다
포병의 중요성은 현대전에 있어서 전쟁 승패의 중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근래 북한의 김정은이가 그렇게도 포병훈련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언듯
뉴스에서 본 것 같습니다
육상의 전투에서는 포병의 그 위력이 절대적으로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지요
무조건 초탄명중에 초전박살입니다
포병은 적을 포격하여 순식간에 무력화시킴을 동시에 아군의 승리를
유도하는 화력지원을 대대적으로 수행합니다
분과별로 다르지만 포병의 기초로서 포사격준비를 위한 방열훈련은 거의
혼을 빼버립니다
순식간에 모든 힘을 쏟아내고 정밀사격을 끝낸 후 조금의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차량에 견인하여 신속히 이동해야했습니다
또한 야간에는 보병의 수색 정찰에 조명탄을 지원해주어 먼 거리에서
적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임무는 굉장히 감격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포사격 시의 굉음은 내장이 뒤집어질 정도로 엄청났으며 그 우렁찬
포격은 포병으로서의 자부심에 위대한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TNT(한꺼번에 쏘아올린 포탄으로 수많은 적을 일시에 무력화시킴)
사격은 그야말로 실사격에 있어서 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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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은 보병과는 달리 소대 중대가 없는 구조입니다
다만 6개의 포반에 통신 FDC(사격지휘소) 행정 수송 등으로 포병부대를
형성합니다
포상(대포의 집) 또한 경북 경주에 있는 웬만한 무덤만하여 그 위상이
가히 위엄스러웠고 믿음직하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특히 강원도 최전방의 그 추운 겨울 내내 일조점호마다 부대 깃발을
휘날리며 웃통을 벗고는 산악구보로 당차게 전진하던 젊은 날의 군가가
지금도 예사롭지만은 않습니다
포병은 평소에 삽질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작업 시에도 삽자루나 곡괭이자루의 군기가 항상 살아있었습니다
삽도 잡는 기본자세에 따라 작업량과 에너지 소모원이 달랐으니
그야말로 요령이 필요한 것이 군대에서는 유일한 기술이었습니다
삽이라고 쉬이 생각없이 힘만 의지하다가는 제 스스로 지쳐서 나가
떨어지게 십상이었지요
가끔 작업을 하다가도 과업이 더디면 곡괭이 자루의 험악한 본성이
드러납니다
또한 군에서는 휴식이란 게 거의 없었습니다
오로지 쉰다는 개념은 일석점오 후였으며 자다가도 순번대로 언제라도
근무에 투입해야했습니다
군 생활 삼년이야말로 누구에게나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무한의 공감대로
형성되겠지만 이 나라에 젊은이들의 인생에 획을 그어준 군복을 입은
입장에서는 분명히 보통의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동시대를 살면서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라도 아무나 군입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신체조건상 현역 판정이어도 정신적으로 나약하면 절대로
버텨내기가 아주 곤란한 곳이 바로 군대였습니다
특히 단체생활로 일석점호 이후는 고참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저 역시 요즈음 세대 군인들을 예사롭게 보질 않습니다
먹고 싶은 거 쉬고 싶은 거 그야말로 모든 걸 국가에 반납한 군인이기
때문에 저의 가슴 한 켠에는 항상 애잔함이 밀려옵니다
한때는 대한민국 국군의 위용스러운 대한의 남아 중에 한 명이였기에
더구나 포병의 위엄스런 자부심에 이 글을 필승의 고지에서 고폭탄처럼
힘차게 서술해보았습니다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군대야말로 두 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
이었지만 남자로서 한번은 경험해 볼만한 영광스러운 가치가 존재해
있었습니다
이제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이 땅에 모든 국군 장병들에게 뜨거운 응원과
힘찬 박수를 보내오며 군복무기간 내내 무탈하시어서 평생의 기억에
소중하게 남을 추억들을 한 아름 품고 의미있게 전역하시길 두 손 모아
고대해봅니다
- 7 -
*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는 인생은
그야말로 시이고 소설인 것입니다
한때 현역으로서 군복을 입어본 것이 자랑스러웠고
건강하게 용맹스럽게 30개월 만기 전역했다는 것이
시인 최 마루의 일생에 가장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대한민국 시인으로서 영원한 예비역 최 마루는 온 국민들과
자손대대의 평화를 위하여 더더욱 위상을 높일 최상의 군대를
고대하오며 평화의 수호신인 국군 장병 여러분께 힘찬
거수경례를 당차게 올려봅니다 “ 탄 ~ 켤 “
* 대한민국 시인 최 마루의 90년도 최전방 포병부대 현역시절 중에서
대한민국의 영원한 예비역 시인 최 마루 배상
☆ 글쓴이 소개 ☆
*대한민국 시인 文明 최마루님의 글입니다.<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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